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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전북에서 부활하다’ (7)묘향산사고와 오대산사고 (전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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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10.07 조회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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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전북에서 부활하다’ (7)묘향산사고와 오대산사고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6.08.19 14:04

오대산사고
오대산사고

 # “실록을 반드시 묘향산에 두어라!”

 실록을 어떻게 보존할까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에서 주목한 명산 중의 하나가 바로 평안도 묘향산(妙香山)이었다. 그런데 이 산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각광받았다. 그것을 확인할 기록은 일연(一然, 1206~1289)과 제자들이 집필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다.

 이 책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고조선 건국과 관련하여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일연은 “태백산은 즉 지금의 묘향산(卽太伯 今妙香山)”이라고 부연 설명하였다. 당시 몽골의 침략으로 자주성에 상처를 입은 현실과 압록강 하류까지가 한계였던 영토 상황을 생각하면 묘향산의 주목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고려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산 중의 하나라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대산 사고
오대산 사고

 이러한 의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령 세조 2년(1456) 3월 28일에 양성지가 명산대천의 제사 지낼 곳 중 하나로 단군이 일어난(檀君所起) “묘향산을 북진으로 삼자(妙香山爲北鎭)”고 주장하거나, 명종 즉위년(1545) 9월 5일에 “묘향산과 구월산은 산이 크고 사찰이 많다(香山?九月山 山之大而寺之?)”는 설명 등이 이를 반증한다.

 그렇다면 실록 보존처로서 주목되는 것은 언제 나타날까? 선조 29년(1596) 11월 7일에 선조는 실록을 강화도에 두면 불안하니 묘향산으로 옮기자고 주장한다. 이에 윤두수가 묘향산 상원사(上元寺)가 지세가 매우 높고 쇠사다리(鐵梯)로만 기어 올라갈 수 있다고 호응하니 선조가 “반드시 묘향산에 두고 사관에게 지키게 하거나 별도 관리를 뽑아 보내야 한다(必置香山 使史官守直 或差定別官 以送可也)”고 강조한 내용이 보인다.

 다시 다음 해(1597) 2월 12일에는 역사 기록(史籍)은 후세에 전하는 것인데 강화도는 바다 가운데의 외딴 섬이라 지키지 못하면 “한 곳에 비치된 역사가 전부 망실될 것(一處藏置之史 全然散亡)”이니 “원래 수장된 실록 외에 2질을 더 찍어서 1질은 금강산에 1질은 묘향산에 두어 수재, 화재, 도적에 대비하자(元藏實錄外 謄寫二本 一藏于金剛山 一藏于妙香山 以爲水·火·盜賊之備)”는 건의가 잇따른다.

 그 결과 묘향산이 실록 소장처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 25년(1592) 7월 1일에 일괄하여 “전주 경기전에 봉안했던 태조의 어진을 묘향산으로 옮겼다”고 적었고, ‘선조실록’에는 선조 33년(1600) 7월 27일에 “묘향산에 보현사(普賢寺)가 있는데 실록 소장처(所藏處)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전주사고본 등 5질의 실록을 인출(印出)하는 대역사(大役事)가 마무리되는 병오년(1606) 4월과 거의 같은 시기인 선조 39년(1606) 4월 28일에는 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의 사각(史閣)도 거의 마무리되면서 본격 묘향산사고에 실록이 분산 소장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북방의 위협이 가중되자 인조 11년(1633) 1월 23일에 묘향산의 실록을 무주 적상산성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오대산 사고
오대산 사고

#오대산사고의 역사와 실록

오대산사고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오대산(1,563m) 북쪽 남호암(南虎巖) 기슭에 있다. 강원감사 윤수민은 오대산 상원사 입구로부터 30리에 위치에 있는 지세가 평탄하고 집이 정결한 봉안처로 오대산 사고지로 보고하였고, 1606년 5곳의 사고에 각각 실록을 보관시켰다. 오대산은 오래전부터 회자되던 명산으로 이름났던 곳이지만 오대산사고지가 선정되기까지 실록 기사는 찾을 수가 없어서 그간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경상도, 강원도 감사의 사고후보지 보고는 원인행위에 따른 행위결과로 이해된다.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그대로 강화도 사고에 봉안하였고, 새로 인출된 실록 3질은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에 분산시켰으며, 오대산 사고에는 교정초고본을 봉안하였다. 선원록이 보관된 것은 1640년경이었으니 그 즈음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오대산사고는 몇 가지 자료를 쫓아 그 규모를 가늠해 보면 2층의 목조기와집으로 2동이 앞뒤로 나란히 서 있다. 앞 건물은 사각이고, 뒷 건물은 선원보각이다. 주변은 낮은 돌담으로 둘렀고, 동쪽과 남쪽에 각각 문을 두었다. 그리고 부속건물로 사고의 동쪽에 별관(別館)이 있고, 월정사 속사인 영감사(靈鑑寺)가 수호하는 형식이었다. ‘경외사고수직절목’(1717)에 따르면, 사고수호는 사고 인근의 백성 4호로 하여금 2명씩 교대로 수직하게 하였고, 승군은 각 사고마다 40명을 정원으로 20명씩 1년간 교대로 근무하고, 참봉은 각 도에서 차출하여 각 사고마다 2명이 교대로 수직하고 1년마다 교체하게 하는 등 조치를 취하였다.

‘오대산사고등록’에는 사고의 관할 경계에 금표가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각으로부터 40리를 경계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상당히 넓게 설정되어 있다. 이는 당시 화전의 피해를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지만 현재 오대산사고 주변은 산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어서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오대산사고 뒤에는 영감난야(靈鑑蘭若) 현판이 달린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사고 사찰 영감사(靈鑑寺)를 복원한 것으로 이해된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1913년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유출되었고, 1922년에는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의 의궤가 일본 궁내성으로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소실되지 않은 일부 실록, 즉 성종 9책, 중종 50책, 선조 15책 등 74책이 2006년과 2011년 두 번에 걸쳐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에 영구보존되었다.

오대산 사고 내부
오대산 사고 내부

오대산사고본이 교정초고본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온전히 보존되었던 전주사고본의 원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전주사고본은 전주사고에서 묘향산으로, 강화도 정종산사고에 보관되었다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인터넷으로 제공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대개 태백산사고본 848책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태백산사고본은 태조~명종까지 실록은 전주사고본을 기초로 인출한 것이고, 선조~철종까지 실록은 후대에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 전주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 사이에 교정자료로서 오대산사고본의 존재는 실록의 인출이 어떤 과정을 거쳐 교정이 이루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오대산 사고 내부
오대산 사고 내부

당시 실록 인출이 완료된 것을 보고한 선조 39년(1606) 4월 28일 기사에는 “새로 인출한 것은 4~5권을 합쳐 1책으로 하기도 하고, 2~3권을 1책으로 합치기도 하였다.”라고 하여 권수의 조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실록기사를 통해서 몇 가지 교정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선조 37년(1604) 2월 11일, ‘태종실록’을 인출하는데 호조전서 정씨의 이름이 당대 어휘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로 이하여 이름을 초(?)자를 써서 고친 것으로 보인다. 또 같은 해 2월 19일에는 ‘태종실록’에 한성부 판윤 원황(元晄)의 이름이 예종의 어휘(李晄)와 같았기 때문에 정초(鄭?)의 사례에 따라 조치하도록 한 것이다. “당대 어휘와 같다”란 뜻이 2대 정종이 방과(芳果)를 고쳐 휘한 ‘경(?)’을 말하는 것인지, 3대 태종의 휘 방원(芳遠)을 말하는 것인지, 4대 세종의 휘 ‘도(?)’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위 사례는 임금과 관계되었기 때문에 인출하는 과정에서 보고되었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이외에도 교정된 곳은 심심치 않게 발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한편 오대산 국립공원 입구에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이 세워졌고, 일본에서 환수된 일부 실록에서 이러한 교정의 사례를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으니 기록을 중시했던 조선시대 위정자들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교정지를 남겼던 당대 사람들의 기록 사랑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대산 사고 내부
오대산 사고 내부

 #산이 지켜낸 조선의 기억

  역사는 책에 기록된다. 그러나 그 책을 지켜낸 것은 한 채의 건물과 한 자락의 산이다. 이른 아침 강원도 깊은 산중의 오대산사고를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장엄하고 수려한 산과 계곡이다. 사고는 좀처럼 자신의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깊은 산줄기가 좌우와 뒤를 감싸고 있고 건물은 자연의 품속으로 한 걸음 물러나 앉았다. 왕궁이나 관아처럼 권위를 과시하지도 않는다. 가장 귀중한 기록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모습을 산속에 깊게 감춘 것이다. 가히 은둔 군자의 모습이다.

  풍수지리학자들은 예로부터 삼재가 들지 않는 길지(吉地)라 한다. 터는 길흉의 논리에 머물지 않는다. 산세로 바람을 막고, 외부의 접근을 어렵게 하며, 습기와 화재의 위험을 줄이려는 환경의 질서와 공간계획이 함께 어울린다. 자연과 건물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천지인(天地人) 삼합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건물을 들여다보면 당시 건축가의 지혜마저 돋보인다.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과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이 영역과 위계를 달리하며 자리한다. 석축을 쌓아 단을 만들고, 두 건물 사이에는 거리를 두어 불이 나도 피해가 번지지 않게 했다.

  수호 사찰 영감사 앞에서도 걸음아 멈췄다. 법당에 걸린 ‘영감난야(靈鑑蘭若)’ 현판에서 ‘난야’는 고요한 수행처를 이르는 불교의 옛말이다. 기록을 지키던 절이 스스로 ‘고요’를 이름으로 삼았으니, 이 산이 무엇을 품어 왔는지를 조용히 일러 준다.

 사고의 주인공은 건물이 아니었다. 영롱하게 떠오르는 일출과 석양의 산 그림자, 산세와 계곡, 치유의 바람과 숲, 담장과 석축, 그 안에 놓인 전체가 한울이 되어 조화로운 시스템으로 맞물렸다. 방재와 보안, 관리계획을 이미 자연 속에서 결합해 구현하고 있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선재길’을 자주 걷는다. 함박눈이 내린 동짓날엔 운치가 있어 아름답다. 길은 구도자인 선재 동자가 쉰 세분의 선지식을 찾아 길을 나섰듯, 가끔 선재 동자가 되어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 속에서 걷는다. 길에는 마음을 씻어 주는 현묘한 에너지가 있다.

 세조는 상원사에서 몸의 병을 씻으며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한다, 큰 스님 한암은 6.25 전란의 불길 속에서 상원사 절과 함께 남기를 택했으며, 김제 출신 탄허는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냈다. 왕과 선사가 거쳐 간 산의 깊이는 나라의 기록을 담아낸 그릇의 도량이다.

  사고는 ‘기록한다’라는 것과 ‘기억한다’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임을 깨닫게 한다. 기록은 종이에 남길 수 있지만, 기억은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과 담아낼 공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가 산에서 마주한 것은 목숨 바쳐 역사를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긴박했던 거친 숨소리였다

 아직 밟지 못한 사고지 산 하나를 떠올린다.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이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의 그 산을 그리움으로 품어본다.

  기획취재단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획취재단

취재기자=이방희 디지털뉴스국장, 김충근 차장, 최진영 차장, 이형천 기자

자문위원=백승기 도시공학 박사, 김병남 전북대 사학과 교수, 김철배 임실군청 학예연구사(박사), 김세용 큰샘출판 대표

 

전북도민일보/이방희 기자

출처 : https://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65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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